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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씨 묘소 발견/국제신문 특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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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 블로그 컨텐츠
































안중근의사 여동생 묘 부산 있다

[광복 60년의 그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역경속 삶

안성녀 여사 54년 사망… 용호동 천주교회묘지 소재 확인

수풀 덮이고 봉분 망가진채 방치

安여사 독립운동 연구 계기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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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녀 여사 독립운동 연구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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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여동생 안성녀(安姓女·세례명 누시아·출생연도 불명~1954년) 여사의 묘지가 세인들의 무관심 속에 부산에서 50년 이상 방치돼 있는 것으로 본지 취재진에 의해 확인됐다.



특히 안 여사 묘지의 국내 존재 여부는 안 여사의 시댁 후손 극소수만 알고 있을 뿐 안중근 의사 가문과 국가보훈처에선 실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학계에서도 안 여사의 독립운동 및 행적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다. 따라서 최초로 외부에 공개된 안 여사의 묘지 및 후손들로 인해 안중근 의사 가문과

안성녀 여사에 관한 연구가 활기를 띨 것으로 예상된다.



본지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최근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독립지사 오항선(95) 할머니를 통해 독립운동가 안성녀 여사의 묘지를 확인했다.



오 할머니는 안 여사의 며느리이다.



1954년 부산 영도구 신선동 2가2 자택에서 사망한 안 여사는 현재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 교회묘지에 안장돼 있다. 안 여사의 장손 며느리 이용순(56·부산 남구 대연동)씨의 도움으로 찾은 묘지는 1m가 넘는 수풀로 뒤덮인 채 방치된 상태였다. 독립운동의 거목인 안 의사 여동생의 묘라고 하기엔 너무도 초라했다.



장대 수풀을 걷어 헤치자 '안누시아성여지묘'라고 쓰인 비석이 주인의 안식처를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출생과 사망연도도 기록돼 있지 않은 비석은 금방이라도 시멘트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갈 듯 훼손된 상태였고, 봉분도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한 듯 곳곳이 파인 채 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묘지는 오륙도가 보이는 전망좋은 곳에 있지만, 바로 앞에 있는 남구 재활용품선별장에서 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또 바로 옆에는 컨테이너 300여개가 적재된 야적장이 들어서 있었다.



안 여사의 묘는 당초 부산 영도구 청학동에 있었다. 그러나 묘지 자리에 부산체고가 들어서는 바람에 1974년 이곳으로 이장됐다.



안 여사 장손인 권혁우(61)씨는 "해방후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서울에 살던 할머니가 한국전쟁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당시엔 부산시장이 직접 챙겨줄 만큼 신경을 많이 썼다"며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50년 이상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건설 일용직으로 힘겹게 살고 있는 권씨는 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권헌·1980년 사망)께서 생전에 '대가를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떠들지 마라'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설명했다.



안 여사의 장손 며느리 이씨는 "살기가 빠듯해 묘지 관리를 제대로 못해왔다"며 "매년 추석에 맞춰 벌초를 하지만 묘지 관리인이 없다 보니 방치되고 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최근 기력이 많이 쇠약해진 안 여사의 며느리 오항선 할머니는 "시어머니는 안 의사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와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립군을 몰래 도왔다"며 "한번은 일본놈들에게 잡혀 9일 동안 감금돼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고 회고했다.



안중근 연구의 태두로 불리는 최서면(79)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안중근 의사 가족에 관한 연구에서 안성녀 여사는 빠져 있다. 역사적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출생 및 사망연도도 불분명하다"며 "만약 안 여사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혔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회1부 광역이슈팀 issue@kookje.co.kr


































안성녀 여사의 행적

일가와 북만주 망명…독립군 지원활동

일경 툭하면 가택수색, 탄압 피해 숱한 이사

광복 귀국후 6·25때 부산 피란, 영도에 정착

처음엔 청학동 안장했다 74년 용호동 이장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묘지에 있는 안중근의사의 여동생인 안성녀 여사 묘소. 무성한 수풀로 뒤덮여 있던 비석이 취재진의 손길로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박수현기자 parksh@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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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중근 의사 일가와 독립운동

안성녀 여사 독립운동 연구 과제

후손들 `가난의 늪`서 허덕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인 안성녀 여사의 묘지가 부산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안 여사의 중국 망명 및 귀국후 생활이 베일을 벗고 있다.



그동안 안중근 의사 가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안중근숭모회 등 관련기관과 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됐지만 안 여사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상태.



본지 취재팀은 안 여사의 외아들 권헌(1980년 사망)씨의 제적등본과 안 여사 후손들의 증언을 기초로 안 여사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어렴풋하게나마 추적했다.



안 여사는 큰오빠인 안중근 의사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1909년 10월26일)한 이듬해에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오빠인 정근 공근 일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안 여사는 남편인 권승복(1920년 사망)과의 사이에서 외아들 권헌을 낳았다. 안 여사의 며느리인 독립지사 오항선(95) 할머니의 증언. "안 진사(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 선생)와 같은 마을(황해도 신천)의 진사 집안인 안동 권씨 집안이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고가 시집갔다고 시어머니가 말했다."



제적등본에 나오는 권헌의 출생 연월일은 1910년 2월10일. 출생지는 중국 길림성 의란현 동대가(吉林省依蘭縣東大街) 50호. 하지만 후손들은 권헌씨의 실제 출생년도가 1914년이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안 여사는 중국 망명 초기에 권헌을 출산한 것이다.



이후 중국 남쪽인 하북성으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손녀 혜영(64)씨와 손자 혁우(61)씨가 태어난 것으로 볼 때 안 여사는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힘겨운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어머니인 안 여사와 함께 생활한 오 할머니는 현재 백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 할머니는 일본 군인들이 독립운동의 거목인 안중근 의사 가문을 지독스럽게 괴롭히는 현장을 생생히 지켜봤다. "시어머니와 함께 독립군들이 입다 해진 군복을 깁고 있으면 난데없이 일본 군인들이 나타나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비밀 문서와 숨겨 놓은 총기를 찾기 위해 가택수색을 했어. 잠시도 편히 놔두질 않았지. 또 일경들의 탄압을 피해 집을 자주 옮겨 다니는 등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지…."



해방이 되자 안 여사는 오 할머니와 가족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안 여사의 남편인 권 선생은 1920년 7월3일 중국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안 여사를 '누님'이라고 불렀다는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주석의 도움으로 서울 청파동과 쌍림동 일대로 거처를 옮겨다닌 안 여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란했다.



안 여사의 손녀인 권혜영씨는 "어릴적 서울 명동성당에 할머니를 따라 몇번 다녔고 아현동으로 기억되는 안중근 의사의 외동딸인 안현생의 집에 감자 캐러 간 일이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당시 부산시장이 마련해준 영도 봉래동의 두칸짜리 가옥에서 생활하던 안 여사 가족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던 다른 피란민이 불편해하자 영도 신선동 2가2번지 산비탈로 거처를 옮겼고, 이곳을 새 본적으로 등록했다.



당시엔 부산시 직원이 매일 안 여사 거처를 방문해 안부를 물을 정도로 신경을 썼다고 한다.



1954년 4월8일 안 여사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전 독립기념관장이었던 안춘생 선생(당시 육군소장)이 헌병 두명을 앞세우고 군용 지프차로 달려왔다고 한다.

















1960년 9월5일 만들어진 안성녀 여사의 외아들 권헌(1910~1980년)씨의 제적등본.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난 것과 아버지(권승복)-어머니(안성녀) 이름 왼쪽에 '망'자가 들어간 것(점선 부분)으로 미뤄 이미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안 여사의 손자 혁우씨는 "안춘생 선생이 쌀 한가마니와 생활비가 든 봉투를 내려놓고 돌아간 뒤 이후 몇차례 더 만났으나 최근에는 10년 넘게 연락이 끊겼다"고 말했다.



안 여사 유해를 영도 청학동에 안장한 후손들은 1974년 대연동으로 이사가면서 현재의 용호동 천주교회묘지로 이장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안중근 의사 가문 중 안 여사의 시댁인 권씨 가문을 기억하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독립운동가 안춘생 선생의 친형인 안봉생 선생의 딸인 안기영(60)씨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도생 선생(사망)의 장남인 기준씨(71)가 그들이다. 안 의사 가문의 '대부' 격인 안춘생(93)씨는 최근 기력이 많이 쇠약해져 안타깝게도 권씨 집안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중 안 여사의 묘소가 부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기준씨가 유일하다.



안 의사 가문 중 유일하게 부산에 거주하는 기준씨는 "1947~1948년께 고모할머니(안성녀 여사)와 함께 김구 주석이 마련해준 서울 을지로 6가의 적산가옥에서 3~4개월 함께 산 적이 있다"며 "당시 할머니에게 '안중근 의사 여동생이 맞느냐'고 물으니 빙그레 웃으시며 '응'하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안중근 의사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안정근 선생의 며느리 박태정(75)씨는 "남편(전 미얀마대사 안진생)으로부터 시고모님(안 여사)이 북만주인가 연해주에서 망명 중 사망한 것으로 들었다"며 "그동안 시고모님 묘지와 후손들이 부산에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는지 의아스럽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전 독립기념관장인 안춘생 선생으로부터 안 의사 가문의 망명시절 안 여사를 북만주 송화강 인근에서 본 적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며 "하지만 시고모님의 귀국 이야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10여년간 안 의사를 연구해온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안 의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80년대 이후 이뤄졌다. 안 여사에 대해서는 사료조차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안 여사에 대해 유일하게 증언해 줄 오항선 할머니마저 고령이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손자인 안웅호 박사(72·미국 거주)는 지난 1991년 귀국해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고모 할머니(안성녀)를 통해 자주 들었다"고 밝혔었다.



사회1부 광역이슈팀



신수건기자 giant@kookje.co.kr



이노성기자 nsl@kookje.co.kr



배성재기자 passion@kookje.co.kr































安중근 의사 일가와 독립운동

형제등 40여명 '구국의 길'

11명만 '독립유공자'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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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가문은 40여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한독립운동사의 축소판인 셈이다.



그러나 독립운동 서훈자는 안 의사와 동생 정근·공근 형제, 사촌 명근·경근, 조카 봉생·춘생·원생·낙생, 안명근의 매제 최익형, 안춘생의 부인 조순옥 등 11명에 그치고 있다. 안 의사의 친동생인 안성녀 여사도 빠져 있다. 그동안 안 의사 가문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안 의사의 가족들은 1909년 안 의사의 의거후 고향인 황해도 신천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로 망명했다.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와 동생 정근(1885~1949)·공근(1889~1940·이상 독립장) 형제를 비롯해 사촌들도 비슷한 시기에 집단 이주했다. 그러나 1911년 여름 안 의사의 맏아들 분도가 러시아에서 일제 밀정에게 독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던 정근·공근 형제는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상해로 떠났다. 안정근은 독립군 모집과 주요 연락업무를 책임졌다. 안정근의 부인 이정서(1957년 사망) 여사도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독립군 가문으로 시집가 일제 탄압을 피해 베트남까지 50차례나 이사를 다닌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이다.



안정근 선생의 며느리 박태정(75)씨는 "시어머니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친정에서 독립자금을 끌어다 조달했으나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훌륭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안정근의 차녀 안미생씨는 김구 주석의 비서를 지내다 훗날 김구의 며느리가 됐고, 해방후 안 의사 가문 중 가장 먼저 귀국했다.



안공근도 임시정부에 들어가 백범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1936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상임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이래 1940년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안 의사의 사촌인 안경근(1896~1978)은 상해와 남경을 돌아다니며 군관생도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안중근의 조카인 안봉생(1908~1980)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붙잡혀 1945년 8월17일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사형 집행일 이틀전 해방이 돼 목숨을 건졌으며, 1990년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안봉생의 동생 안춘생(93) 전 독립기념관장은 중국 육군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소령으로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안중근 연구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79) 원장은 "안 의사의 가문에서 수십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했음에도 독립운동 서훈자가 11명에 그친 것은 학계의 연구가 부진한 탓"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누구나 안 의사의 손도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른 손가락은 어디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며 "사료 발굴과 현장 조사를 통해 가족사 등 각론 연구가 활성화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2005/07/31 21:33]

































안성녀 여사 독립운동 연구 과제

생년조차 몰라… 기록없어 철저히 소외

일제 공판기록 安 의사 남자형제들만 언급

보훈사업 전 54년 사망 관심밖 밀려난 듯

安 여사 살아 생전 행적 총체적 연구 절실






















안성녀 여사의 며느리인 오항선 할머니가 보관중인 사진들. 맨 윗 사진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봉생(왼쪽)과 안성녀 여사의 아들 권헌이 1970년대 초반 안성녀 여사의 묘에서 찍은 것이다. 가운데는 오항선 할머니(왼쪽), 김좌진 장군의 둘째부인 나혜국 여사와 그 아들. 아래는 안중근 후손의 대부격인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왼쪽)과 안성녀 여사의 장손 권혁우씨가 1981년 권헌의 묘비 앞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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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 여사가 역사의 베일에 가려졌던 이유는 뭘까.



안 여사의 며느리이자 독립지사인 오항선(95·부산 남구 대연동) 할머니는 "시어머니는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독립군들을 도왔다. 일본군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안 의사의 동생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던 것이다.



▲ 역사가 외면한 안성녀의 삶 = 안 여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이유는 사료의 부족에서 비롯됐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일본의 재판기록이나 광복군 명단이다.



하지만 어떤 기록에도 안 여사에 대한 자료는 없다. 심지어 안 의사에 대한 일제의 심문 및 공판기록에도 안 의사 남자 형제들만 언급될 뿐 안 여사는 빠져 있다.



안 여사는 중국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일본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안 여사가 국가보훈사업이 시작되기도 전인 1954년 사망하는 바람에 학계나 정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대 장석흥 교수는 "안 여사의 생년월일조차 확인이 안될 정도로 기록이 전무하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도 안 여사의 해방 전후 행적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며느리 박태정(75)씨는 "시고모님(안성녀)이 1920년대 중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진술할 정도. 현재 안 의사 가문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는 안춘생(93) 전 독립기념관장도 안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안 여사의 아들인 권헌(1980년 사망)과 친했던 안봉생(1908~1980·안춘생의 형) 선생마저 1980년 사망하면서 두 가문의 교류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국가보훈처의 무관심도 한몫을 했다. 안 여사의 손자 며느리인 이용순(56)씨는 "1974년 시할머니(안성녀) 묘를 천주교 묘지로 이장한 뒤 부산지방보훈청에 관리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0년 전에도 똑 같은 요구를 했지만 묵살당했다"고 말했다.



만약 국가보훈처가 당시 안 여사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었다면 현재는 상당한 연구성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이씨는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 가문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다. 현재 안 의사 일가의 독립운동 연구는 대부분 안 의사 개인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안중근 가문 중에서는 동생 정근과 공근에 대한 연구 논문이 1편씩 나왔을 뿐 안성녀 여사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 국가적 차원의 연구 필요 = 전문가들은 안성녀 여사의 독립운동을 비롯해 총체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안 여사의 독립운동 기록을 밝혀내는 것은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사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안 여사는 1909년 큰 오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뒤 둘째오빠 정근(1885~1949)의 인솔로 연해주와 만주 등지로 망명길에 올랐다. 안 여사와 결혼한 권승복(1920년 사망)도 독립운동가였다. 안 여사의 며느리 오항선(95) 할머니는 "시어머니는 몰래 독립운동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한 탓에 전면에 나서기 힘들었다. 이사도 밥먹듯 했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 연구의 1세대로 꼽히는 최서면(79)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안 의사 가문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며 "당시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안 여사도 독립운동에 헌신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안성녀 여사의 출생 및 사망연도도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 사망연도는 후손들의 기억에 의해 어느정도 드러났다. 1941년생인 안 여사의 큰 손녀 권혜영씨는 1954년 4월8일 안 여사가 사망한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 한국전쟁이 터지고 중학교 1학년때 서울 동구여중에 진학했어요. 입학식(4월2일 또는 3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나는 참석하지 못했지요."



출생연도는 오리무중이다. 안 의사의 동생인 공근이 1889년생인 점으로 미뤄 안 여사는 1890년대 초반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 여사의 며느리인 오항선 여사도 시어머니 생년월일과 띠를 기억 못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며느리인 박태정(75)씨는 "아무도 모르고 있던 시고모(안성녀)의 묘가 부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너무 기쁘다"면서 "앞으로 안성녀 여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회1부 광역이슈팀



신수건기자 giant@kookje.co.kr



이노성기자 nsl@kookje.co.kr



배성재기자 passion@kookje.co.kr



※기사제보=(051)500-5191 issue@kookje.co.kr
































후손들 '가난의 늪'서 허덕

오항선 할머니 집안, 보조금으로 빠듯하게 생활

































안성녀 여사의 며느리인 오항선 할머니(맨 오른쪽)와 그 가족들. 오 할머니 왼쪽으로 첫째딸 권혜영, 장남 권혁우, 외증손자 조재용군, 며느리 이용순씨. 박수현기자 parksh@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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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 여사의 며느리인 오항선(95·부산 남구 대연동)할머니도 여느 독립운동가 집안이 그러하듯 '가난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항선 할머니의 시아버지인 권승복 선생은 군량미 조달과 비밀문서 전달의 임무를 수행한 독립운동가. 오 할머니가 첫 남편과 사별후 재혼한 권승복 선생의 아들 권헌(1910~1980년)도 1930~1940년대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독립군의 군량미를 조달했다.



오 할머니의 남동생 역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옥에서 총살당했고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자살했다. 독립운동을 인연으로 세 가문이 혼사로 묶인 것이다.



부귀 영화를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오 할머니 집안의 살림살이는 '팍팍'했다. '독립운동가'라는 자존심과 긍지는 가난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성녀 여사의 손자인 권혁우(61)씨는 고등학교 중퇴 학력이다.



그가 가진 직업이라고는 1970년대 부산 남구 용당동 옛 세관 부지에 있던 합판 공장에서 보일러 일을 8년 하다가 8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에서 3년을 일 한 것이 전부. 이후 권씨는 건설 현장을 떠돌고 있다.



오 할머니의 집은 부산 대연동의 25평 빌라. 집 값 1억원 가운데 8000만원을 부산지방보훈청과 은행에서 대출받아 3년전 구입했다.



여기서 오 할머니와 권씨 내외, 권씨의 둘째 딸 등 4명이 살고 있다. 매월 대출금 이자로만 67만원 정도가 나간다. 여기에 이자를 갚기 위한 적금을 30만원씩 붓고 있어, 매달 100만원 가까운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권씨 집안이 정부에서 받는 돈은 보훈연금 140만원과 생활보조금 80만원 등 220만원. 대출 원금상환 및 이자와 20만~30만원씩 빠지는 공과금을 빼고 나면 항상 적자. 셋째 딸이 보태주는 50만원을 합쳐야 간신히 네 식구가 먹고 산다.



이런 형편에서 권씨가 자식에게 가지는 미안함은 크기만 했다. 장남 권순일씨와 2남 권순호씨가 사는 서울의 자취방은 5년 전 순호씨가 형과 같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얻은 월세방. 방 1칸에 부엌이 딸린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0만원의 4평 자취방에서 안 의사 후예들이 어렵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씨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셋째 아이를 장남과 일부러 같은 대학교에 보냈다"며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비록 힘들게 살아왔지만 안중근 의사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고이 간직한다는 자식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기운이 솟는다"며 물질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은 자식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2005/07/3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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